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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潤

X

韓皓蓮

<조윤 X 한호연>

​-연-

어릴 적 이야기다. 조윤이 자신의 친아버지 조원숙에게 팔리듯 집안으로 발을 들이기 한참 전부터 있었던, 그럼에도 아무도 입에 올리지도 발을 들이는 모습도 보지 못했던 지하실에 관한 것이다. 윤은 집안에 처음 발을 들인 순간부터 지하실에 대한 궁금증이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께 여쭤볼라치면 매섭게 변하는 얼굴이 절로 입을 다물게 만들었고, 잠깐이라도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바라보고 있으면 버럭 호통을 치시는 새어머니 탓에 지하실에 들어가 보기는커녕 계단 한 칸을 내려가 보지도 못했다. 조윤은 집에 들어오게 된 지 1년이 지나서야 지하실에 대한 호기심을 접어야겠다 생각했다. 끓어오르는 호기심도 눈을 감으면 분명 사그라 들리라, 그리 생각했었는데. 그날 새벽 조윤은 지하실을 내려갈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었다.

 

사실 조윤은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 본 적이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방에 올라가려던 윤의 다리를 붙잡은 것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의 끝에서 어렴풋하게 보이는 불빛이었다. 누군가 지하실을 다녀간 흔적이라 생각한 조윤은 조원숙과 새어머니가 아직 식탁에 앉아 계신 것을 확인한 후 계단을 내려갔다. 한 칸 한 칸 계단을 내려가면서 아버지에게 들키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과 도대체 무어가 있길래 그리도 꽁꽁 감춰드는 것일지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했다. 계단을 전부 내려가자 다른 방들과 별 차이 없는 나무 문이 나왔다. 조윤은 문에 귀를 대고는 소리를 들으려 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다시 귀를 뗀 후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아마 돌리기 직전까지도 수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가며 갖가지 물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문고리를 돌리자 수많은 기대와는 다르게 꿈쩍도 하지 않는 문에 실망을 느껴야만 했다. 문이 잠겨 있던 것이었다. 하긴, 그렇게 들어가지 못하게 했는데 잠가 놓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실망감과 동시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조윤은 두어 번 문을 흔들다 결국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왔다. 아무래도 이 일이 지하실에 대한 호기심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계기였으리라.

 

잠에서 깬 조윤은 물을 마시러 갈 생각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아직 동이 트기 전인 탓에 어두운 방 안에서 조심히 발을 옮겼다. 그 사이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문에 가까워질 때 즈음 조윤의 발에 무언가 치였다. 뭐지. 몸을 수그려 바닥을 더듬어 잡은 물건은 열쇠였다. 무슨 열쇠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도 제가 자는 사이 잠자리를 보러 온 양 집사가 흘리고 간 것임은 분명했다. 무슨 열쇠일까. 이 집에서 열쇠가 필요한 방이 있었던가. 그리 생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퍼뜩 머릿속에 지하실이 떠올랐다. 설마. … 아니겠지. 양 집사가 지하실 열쇠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아니 어쩌면, 정말 만약에 이 열쇠로 잠긴 지하실 문을 열 수 있다면…….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더 이상 지하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겠다 다짐해놓고는 금세 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꼴이 퍽 우스웠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1년 동안이나 저를 괴롭혀온 궁금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 조윤은 열쇠를 손에 꽉 쥐고는 방에서 나가 망설임 없이 곧장 지하실로 향했다.

어두운 탓에 열쇠구멍이 보이질 않아 한참을 실랑이 벌이던 조윤이 끝끝내 열쇠 구멍에 열쇠를 집어넣었다. 역시 지하실 열쇠가 맞았구나. 열쇠를 돌리자 잠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고리를 붙잡고는 심호흡을 하던 조윤이 비장한 표정을 하고는 문고리를 돌렸다.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아 뻑뻑할 줄 알았던 문은 의외로 부드럽게 열렸고, 아직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지하실 안으로 발을 들인 조윤은 벽을 더듬으며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행여나 빛이 새어나가 저가 여기에 있는 것을 들킬까 우선 문을 닫고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다. 어둠에 적응됐던 눈을 찌푸리며 몸을 돌리자 보이는 거대한 수조와 그 안에 있는 것은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본 상반신은 사람에 하반신은 물고기로 이루어진 인어였다.

 

조윤은 놀라움으로 굳어 가만히 수조안 인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이게 모두 꿈이라 생각했다. 역시 그토록 원하던 열쇠가 갑작스럽게 제 손에 들어올 때부터 이상하다고 눈치를 챘었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 인어라니. 그것도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동화책에 나오는 아름다운 여자가 아닌 10대 후반 즈음 되어 보이는 곱상한 남자였다. 새하얀 꼬리가 상당히 크고 화려했는데, 마치 물고기 중 베타를 연상케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꼬리에 시선을 떼지 못하던 조윤이 고개를 들어 유리에 찰싹 붙어서는 저를 바라보는 인어와 눈을 마주했다. 인어다. 모형 같은 게 아닌 살아있는 인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입 밖으로 소리가 내뱉어지질 않더라. 가만 눈을 마주하던 인어는 살 눈을 휘며 웃음을 내보였다.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 따위는 기억에 남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에 누워 밤을 꼬박 지새웠고, 열쇠는 아주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손으로 꼭 쥐고 있는 상태였다. 여전히 지하실에서 본 것이 꿈만 같았다. 조윤은 하루 종일 지하실에 있던 인어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꽉 채웠다. 학교에서 돌아와 책상에 앉아 교과서를 피고는 문제를 풀다 가도 인어를 떠올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집중을 하다가도 눈앞에 인어가 아른댔다. 영 집중을 할 수가 없어 쥔 샤프로 교과서 모퉁이를 꾹꾹 누르고 있자니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 집사였다. 시선으로 바닥 곳곳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니 어젯밤 흘리고 간 열쇠를 찾으러 온 것이 분명했다. 조윤은 한 번 양 집사에게 시선을 흘리다 다시 교과서를 들여다보는 척을 했다.

“도련님 혹시… 방 안에서 열쇠 못 보셨습니까요.” 양 집사의 입에서 열쇠라는 단어가 나오자 조윤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조윤은 의자를 돌려 양 집사를 바라보았다. “무슨 열쇠?” 태평하고 뻔뻔한 목소리였다. 조윤 스스로도 이토록 뻔뻔하게 굴 수 있는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 그것이…….” 양 집사는 예전부터 조윤이 지하실에 대해 유별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지하실의 열쇠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손에 넣으려 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양 집사는 서둘러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는 후다닥 조윤의 방을 빠져나갔다. 양 집사는 도련님이 모른다면 방 청소를 한 가정부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열쇠라면 조윤의 바지 주머니 속에 얌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조윤은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그냥 돌려주는 게 맞았을까. 걱정을 한가득 집어먹고는 방금 전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할 때 즈음 다시금 인어가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역시 조금 더 열쇠를 가지고 있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후회는 금세 눈 녹듯 사라지고 어서 가족이 전부 잠드는 새벽이 되길 바라는 기대감만이 가득했다.

 

조윤은 그날 새벽에도 방을 나와 아무도 몰래 지하실로 향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능숙하게 어둠 속에서도 열쇠를 꽂아 돌리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후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눌렀다. 등을 돌리자마자 오늘도 인어가 유리에 찰싹 달라붙어 조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는 벽에서 등을 떨어트리지 않은 채 바라보기만 했었지만 오늘은 용기를 내 수조 가까이에 다가갔다. 그렇다고 해도 세 발은 더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 안녕.” 침대에 누워 인어를 떠올리며 다시 봐서 무얼 하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했다. 우선 말을 걸고 싶었다. 대답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인사라도 해보고 싶었다. 인어는 가만히 조윤과 눈을 마주하다 유리에 대고 있던 손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말을 알아듣는구나. 조윤은 놀라움을 숨기지 않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말할 줄은 알아?” 이번에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대화는 주고받을 수 없음에 아쉬웠지만 제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느낌을 받았다. “이거… 혹시 꿈이야?” 조윤의 말에 인어는 웃음을 내보였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조윤은 인어가 웃는 것이 참 예쁘다 생각했다. 꿈이든 꿈이 아니든 괜찮을 것 같았다.

조윤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매일같이 인어를 찾았다. 새어머니와 양 집사가 없는 날에는 새벽이 아닌 낮에 들러 그날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거나 가만히 수조에 기대앉아 책을 읽기도 했다. 조윤이 무엇을 하든 인어는 항상 유리에 찰싹 들러붙어 조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낮에 가지 못하는 날에는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에라도 찾아갔고, 그런 날에는 간단한 인사와 짧은 몇 마디만 건넨 후 다시 나와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런 날에는 항상 아쉬움이 가득해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도 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려 하기도 했다. 조윤은 인어가 마음에 들었다. 이름을 묻자 고개를 저어 이름이 없다고 표현하는 인어에게 한호연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며 호연아, 호연아 하고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인어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손을 맞대기도 했고, 아무런 말없이 한참을 서로의 눈을 마주한 채 서있기도 했다. 조윤은 한호연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놀랍게도 조윤은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인어를 찾아갔고, 집안의 어른들에게는 들키지 않은 듯했다. 일 년 동안 이렇다 할 일 없이 지내던 조윤에게 새어머니의 임신 소식은 놀라움과 동시에 불안함을 안겨주었다. 조원숙은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을 원했고, 본처가 네 명의 딸을 낳은 탓에 조윤을 거두어들인 것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아들이 있었더라면 혼외 자식인 조윤을 거두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걸 조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현실로 다가오고야 말았다. 새어머니는 아들을 낳았고, 조원숙은 더 이상 조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조윤은 제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무엇이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최대한의 노력을 다 했으며, 결과 역시 윤의 노력을 뒤따라 좋은 성적을 보였다.

그동안 자연스레 한호연에게 찾아가는 발걸음을 줄어들었고, 차츰 시간이 지나자 이내 지하실을 찾지 않게 되었다. 한호연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종종 떠오르는 흑색의 머리칼이나, 눈이 시리도록 하얀 지느러미들이 바로 앞에서 보듯 생생하게 펼쳐지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윤은 한 눈 팔 여유 따위 갖지 못했다. 죽어라 노력하고, 좋은 결과를 얻음에도 과시하지 않고 가만히 칭찬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어렸을 적처럼 자신을 바라봐 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조원숙의 눈엔 오로지 배다른 남동생인 조서인만이 보일 뿐이었다. 고작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조윤은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고, 끝없이 밀려오는 허탈함과 공허함에 매일 밤을 설쳤다.

 

다른 날에 비해 학교가 일찍 끝난 날이었다. 곧장 집으로 간 조윤은 분명 아버지가 회사에 계실 시간임에도 신발장에 놓여있는 신발을 보며 의아함을 느끼고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까 말해주었던 것들을 잘 기억해두어라, 서인아.”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네, 아버지.” 어린 제 동생의 목소리를 뒤이어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제가 어릴 적에는 지하실 얘기만 나와도 그리 무서운 표정을 짓던 아버지가 직접 조서인을 데리고 지하실에 갔다. 분명 한호연을 보여주고서는 제겐 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해주었겠지. 조윤은 입안 여린 살을 짓이겼다. 질투심이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다가도 금세 허무함이 몰려 질투심을 덮었다. 조윤은 그 후,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가 독립을 했다.

 

조윤은 집을 나간 후 몇 년이 지나도 연락 한 통 보내지 않고 얼굴 한 번 비추지를 않았다. 물론 조원숙 쪽에서 먼저 연락을 넣은 적도 없었다. 큰 행사가 있으면 축하하는 편지 한 장을 써 보내는 것이 다였다. 그렇게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들이었다. 십 년이 지나 조서인이 사고로 인해 사망하고 그 충격으로 인해 어머니까지 뒤따라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조윤은 고민 끝에 집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십 년 만에 본가에 돌아온 조윤은 마치 지하실에 대해서는 잊은 사람 같았다. 5년 전부터 급격하게 몸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한 아버지 조원숙을 돌보고 사고로 죽은 제 동생을 대신하여 회사 일에 끼어들었다. 회사 일에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기획 중인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만날 사람이 많았다. 하루하루를 바쁘게 움직였고 머리가 꽉 차 지하실에 대한 생각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 모두 그럴싸한 핑계들이다. 조윤은 한 번도 지하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집을 나간 뒤에도 틈만 나면 지하실에 대한 생각에 넋을 놓고는 했다. 정확히 말하면 지하실 수조안에 있을 한호연에 대한 생각으로 밤 잠 이루지 못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행여나 저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 때도 있었다. 조윤은 여전히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볼 때면 다리가 묶인 사람처럼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어둡고 발 들이는 이 없는 저곳에서 한호연은 혼자 무얼 하고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동안 조서인이 저를 대신해 드나들었을 수도 있겠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그제야 조윤은 발을 옮길 수 있었다. 아마도 저를 잊었으리라. 조윤은 쓴 마음을 다잡아 야만 했다.

 

아무리 제가 그리워한다 해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처리해야 할 서류 뭉치를 살피던 조윤이 아래층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미간을 좁히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놓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무슨 일이지?” “도, 도련님! 그것이, 다름이 아니고……” 조윤을 보며 화들짝 놀라는 양 집사의 태도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안절부절못하는 양 집사의 시선을 쫓아갔다. 시선 끝에 걸린 것은 다름 아닌 지하실이었고, 양 집사는 아마 조윤에게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을지에 대해 머리를 굴리고 있으리라. 조윤은 양 집사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지하실 안에 있는 것에 대해서라면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무슨 일인지 말해.” 조윤의 말에 양 집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예? 도련님께서 어찌……. 아, 아니. 그게, 지하실에 있던 인어 놈이 유리를 깨부순 모양입니다.” “뭐?” “원래는 얌전했는데, 요 며칠 동안 갑자기 미친놈처럼 유리를 두들겨대더니만…….” 양 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을 옮긴 조윤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문고리를 돌리자 물에 젖은 바닥을 닦고, 유리를 치우는 가정부 둘과 고개를 숙인 한호연의 두 팔을 뒤로 묶어 놓고는 팔과 꼬리를 붙잡아 움직임을 막은 남자 둘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있던 자잘한 유리조각들이 한호연의 꼬리를 찔러 피를 냈다. 조윤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직 덜 치운 유리조각이 발을 찔렀음에도 개의치 않고 발을 옮기자 그것을 알아챈 한호연이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저와 눈을 마주하는 한호연은 십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날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조윤과 눈을 마주한 한호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곧 웃음을 내보였다.

마치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조윤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남자 중 하나가 한호연의 팔을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윤에게 다가섰다. “이사님, 아직 들어오시면……!” 조윤은 여전히 한호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얌전한 것 같은데 쓸데없이 둘이나 붙잡고 있는 것보단 어서 치우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 조윤의 말에 반박을 하려다 시선을 옮겨 저를 바라보는 조윤을 보고서는 입을 다물고 자리를 옮겼다. 조윤은 서둘러 한호연에게 다가가 팔을 묶은 줄을 풀어냈다. 조윤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한호연을 안아 들고는 계단을 올랐다. 한호연은 여전히 조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손을 들어 제 뺨을 감싸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 따뜻하다.”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윤은 제 방으로 향하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 말할 줄 아네.” “배웠어. 너랑 대화하고 싶어서.” 방으로 들어온 조윤은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한호연을 앉혀 놓았다. “누구한테?” “너한테. 매일 찾아와서 조잘거렸잖아.” 그랬지. 하루가 멀다 하고 네게 찾아간 어릴 적의 난 너와 대화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다. 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었고, 차가운 유리가 아닌 네 손에 닿고 싶었고, 눈을 마주하는 사이의 유리가 없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조윤이 물을 틀어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도 아직 그때의 간절함이 남아있다. 산처럼 쌓인 질문들을 네게 쏟아내고 싶고, 너를 알고 싶고, 조금 더 닿고 싶다. 조윤은 일렁이며 서서히 욕조를 채우는 물을 가만 바라보았다. 한호연은 그런 조윤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조윤의 뺨을 감싸 어루만졌다. “… 나 기다렸어.” 그토록 묻고 싶던 말을 아직 입 밖으로 내뱉지도 않았건만 툭 튀어나온 대답에 조윤이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했다. “이름 불러줘, 네가 지어준 이름.” “…… 호연아. 한호연. 정말 나 기다렸어?” 제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리는 게 도망가지 못하게 옭아매는 것 같다 생각했다. 조윤은 고개를 돌려 한호연의 손바닥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응. 조윤, 너 기다렸어.” 서로 마주한 눈이 가깝고 선명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을 벅차게 만드는 것들뿐이었다. “… 보고 싶었어.” 욕조에서 흘러넘친 물이 조윤의 다리를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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