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蛮骨 X 千代子 X 煉骨
< 반코츠 X 치요코 X 렌코츠 >
-엠-
인어를 잡지 말라는 건, 인어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네.
00
땅 위의 인간들은 동이 트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을까? 그것은 마치 막 알을 깨고 부화하는 둥지 속 새의 소리처럼 간질간질하고 가벼운 탄생의 소리다. 눈부신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미세한 파음은 수면 위를 떠돌고, 바람은 그 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치요코는 아침이 올 것 같으면 수면까지 바짝 헤엄쳐 올라오곤 했다. 그리고 허리를 곧게 피고 눈을 지그시 감고선 피부로 느껴지는 어루만짐에서 마음껏 사랑을 느꼈다. 태어난 고향이자 근원인 물이 언제까지나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언제까지나 함께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굳게 믿으며 말이다.
치요코와 그녀의 동지들이 살고 있는 곳은 따듯하고 깊은 호수였다. 바닥에선 돌 틈 사이로 언제나 깨끗한 물이 흘렀다. 뭍 가까이 가면 부레옥잠과 높다란 연꽃이 가득했다. 호수에 사는 인어들에게 그 수중 식물은 아주 이롭고 고마운 식물이었다. 널따란 잎은 물론 그 아래의 뿌리들은 인어들에게 그늘과 남 몰래 쉴 수 있는 은신처를 주었다. 어린 인어들은 술래잡기를 했고 연인 사이인 인어들은 다른 인어들 몰래 그 곳에서 사랑의 속삭임을 주고받았다.
그중에서 연꽃은 특히나 가장 유용한 식물이었다. 인어들은 연꽃의 연근과 연밥을 주로 먹고 살았다. 물론 물풀과 수면 위로 떨어지는 과일과 도토리 따위를 먹기도 했지만 연꽃만큼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치요코는 연밥을 좋아했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복숭아였다. 그녀가 아직 어린 인어일적, 호수 근처에서는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뭍 위의 짐승들이 다 먹지 못한 복숭아는 시간이 지나면 바람에 떨어져 수면 위를 떠다녔는데 그맘때쯤 되면 치요코는 다른 물고기들이 복숭아를 건드리기 전에 서둘러 복숭아를 가져가곤 했다. 그러나 지금 복숭아나무는 병에 걸려 죽어버렸고 치요코는 두 번 다시 복숭아를 먹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어릴 적 먹었던 향긋하고 달콤한 그 과실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 매해 그 시기만 되면 치요코를 안달 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치요코가 사냥에 성공한 것도 그 시기였다. 인어의 포획은 나라에서 엄격하게 금지된 것으로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지능을 가진 인어들을 사냥하거나 사로잡아 매매하는 짓은 살인이나 인신매매 정도는 아니어도 심각하게 여겨지는 범죄였다. 하지만 어느 곳이 그렇듯 법이 전부 지켜지는 것은 아니어서 어마어마한 가격을 갖고 있는 인어들을 사냥하러 온 인간들은 끊이지 않고 나타났다. 특히 치요코 같은 호수나 강에서 사는 인어들은 바다에서 사는 인어들보다 한번 찾아내면 잡기 어렵지 않기에 나라의 눈을 피해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인어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인어 사냥을 나온 인간들이 치요코의 호수에 온 것은 새벽녘으로 치요코는 그 날 따라 일찍 일어나 헤엄치며 홀로 동이 트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물결은 잔잔했고 날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따듯한 편이었다. 물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치요코는 순간 무언가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보니 익숙한 모양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과일들이 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치요코는 눈을 깜빡였다. 가을이라 과일들이 떨어질 시기라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과일들이 이상할 정도로 모양새가 예쁜 것들만 있다고 느끼기도 전에 과일 중 너무도 먹고 싶었던 복숭아를 보게 되었다. 복숭아나무가 썩었으니 있을 리 없을 텐데 이상한 노릇이다. 치요코는 경계심이 많았기에 가버리려고 했으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나마 복숭아 가까이 다가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눈치 챘을 때는 온 몸에 그물이 감긴 뒤였다. 우와, 진짜 잡았다고! 어부들의 환호성 소리가 울려 퍼졌고 치요코는 처음 보는 수많은 인간들의 모습에 공포에 질 헐떡이다 까무룩 하고 정신을 잃었다.
01
사람을 죽이는 일에서 죄책감 따위 느끼지 못한 것이 어느 날부터였냐고 묻는다면 그야 아주 오래전이라 처음부터라고 해도 좋을 정도라고, 반코츠를 포함한 칠인대는 익숙하게 시체를 넘어갔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조금도 없었지만 전쟁에서 죽음이야 흔한 법이다. 항구를 두고 이루어진 전쟁에서 승리한 칠인대가 상대의 성의 창고를 열고 쓸 만한 물건들부터 전리품 목적으로 바삐 챙기고 있을 때였다.
창고에서 커다란 욕조를 제일 먼저 발견한 건 렌코츠였다. 그가 다른 형제들을 부르자 곧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삼삼오오 모여 욕조 가까이 다가갔다. 검은 천에 가려진 그것은 이상토록 거대했다. 무엇보다 보석과 황금 같은 귀금속들 사이에서 커다란 욕조라니. 다들 이상하다는 눈을 보낼 때 렌코츠는 홀로 눈을 빛냈다. 혹시나, 인어가 아닐까?
본래 인어가 흘리는 눈물은 보석이 되고 비늘을 입에 물면 물 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으며 고기를 먹으면 불로한다는 말이 있다. 마지막은 허구에 불구하나 인어는 불로장생이 아니더라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의 법으로 매매는 금지 되었으나 높으신 양반들은 암시장에서 인어를 물색하곤 했다. 범죄 물품이 흔히 그렇듯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말이다. 인어는 그만큼 쉽게 볼 수 없는 것으로 렌코츠는 수조 안에 인어가 들었다면, 하는 기대감으로 번뜩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반코츠가 까만 천을 걷어내자 수조 안에는 넘실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보였다. 반코츠가 유리벽 가까이 눈을 가져다댔다. 렌코츠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수조 안을 바라봤다. 창백한 피부 사이로 일렁거리는 머리카락은 꼭 연기 같았다. 인어가 머뭇거리며 욕조 밖으로 올라왔다. 밖을 탐색하듯 보는 맑은 눈망울이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둥글고 선이 고운 미모 다음으로 칠인대는 이내 물고기의 꼬리를 볼 수 있었다. 헤에. 비늘과 지느러미를 본 반코츠가 탄성을 질렀다. 정말로 인어잖아?
02
그 인어는 굳이 매질을 하지 않아도 잘만 울었다. 조금만 겁을 주면 수조 바닥에 후드득 눈물이 쏟아졌고 조금만 윽박지르며 시키면 보석이 된 눈물을 주어다 손 위에 올려 주고 다시 물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고집이 센 인어가 아니라 다행은 다행이었지만 렌코츠가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어쩐지 못마땅한 기분이 들 무렵, 그는 반코츠가 인어에게 자주 찾아가는 것을 눈치 챘다. 반코츠는 재물에 대한 욕심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어서, 자신들을 고용할 때 높은 가격을 부르는 것도 자기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는 자존심에 비롯되었을 뿐 재물에 집착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상토록 인어에게 들리는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적, 렌코츠는 반코츠가 인어를 번쩍 들어 올려 물 밑으로 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봐.”
겁에 질린 인어가 꼬리를 파닥거리다가 쭈그리자 반코츠가 어쩐지 들뜬 어조로 말을 걸었다.
“다시 한 번 변해봐. 얼른.”
렌코츠가 그 말에 이상함을 느끼기도 전에, 인어는 머뭇거리다가 반코츠가 재촉하자 천천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렌코츠가 뭘 변하라는 건지 이상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는 제 눈을 의심했다.
비늘과 지느러미로 이루어진 꼬리가 천천히 사람의 다리처럼 변했다.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다리가 많았다. 얌전히 모아 가슴팍까지 접은 허연 다리는 분명 인간 여자의 다리와 다른 것이 없었다. 반코츠는 만족한 듯이 웃더니 제 옆을 탁탁 두드렸고 인어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다가 다가와 그 자리에 앉았다. 렌코츠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멀거니 둘을 바라보았다. 말이 통하지 않음에도 반코츠는 혼자 떠들고 혼자 즐거워했다. 그건 어쩐지 아주 이상한 장면일 텐데도, 어쩐지 그럴싸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03
인어는 그리 오래지 않아 옷을 입게 되었고 머리도 묶었으며 입술연지도 가끔씩 하게 다. 고소데 아래의 발이 있을 곳에 삐죽 솟은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만 아니라면 누구나 인간으로 볼 것이 틀림없었다. 있는 곳도 욕조 대신 방에 앉아 있는 날이 늘었다. 누가 보면 인간 여자라고 믿을 정도의 모습에 무코츠는 흘끔거리기 일쑤였고 쟈코츠는 비린내만 난다며 주변에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장 이상한 태도를 보인 건 누가 뭐라고 해도 반코츠였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장에서 먹을 것을 사다가 인어에게 던져주곤 했는데, 말린 다시마를 야금야금 먹는 인어를 흐뭇한 것처럼 뚫어져라 바라보곤 했다. 시간이 지나고 인어가 사람 말을 하게 될 때도 그랬다. 선생질을 하기엔 학식도 부족한 그가 어설프게 인어에게 말을 시키는 모습을 보던 렌코츠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다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다.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원래라면 진작 팔아버렸을 것을…….
누군가 그랬던가. 인어를 사고파는 것을 금지한건 사실 인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라고. 렌코츠는 언젠가 무심코 항구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인어에 대한 말로 술에 취해 떠들던 사람들 중 유독 조용한 노인 한명이 그렇게 말했다. 인어는 사람을 홀리니 곁에 둬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마루에 앉아 반코츠에게 포도를 받아먹고 있는 인어를 렌코츠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매끄러운 머리카락과 까만 눈, 예쁜 이목구비는 오밀조밀했고 작은 손발과 가는 목이 인간 여자처럼 어여뻤다. 아니, 어쩌면 인간보다 더…….
‘얘 말이야.’
인어에게 붙은 시선으로도 문득 반코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름이 뭘까?’
……더 아름다웠다.
04
인어는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 좋네.
술에 취한 어부들의 과격한 웃음소리와 허세에도 노인은 시종일관 묵묵하게 말을 이었다. 숱한 바다를 누볐던 그는 무슨 과거를 갖고 있는 지는 몰라도 인어에 있어서만큼은 진지했는데, 인어가 그렇게 아름답고 예쁘면 정말로 색시로 삼고 싶다고 털어놓은 총각에게 무안해질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인간은 몰라도 인어는 절대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한번 빠지면 결국 손해보는 건 사람쪽이란 말이지. 하물며 아내라니…….
05
……치요코가 둘을 떠난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