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nte X Eunwol
< 단테 x 은월 >
-로-
*약고어 주의
*유혈 주의
은월은 막 잠에서 깨어나 의식이 몽롱했다. 눈을 느릿느릿하게 뜨고 있을 때, 별안간 물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소리와 함께 누워 있는 바닥에 차가운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은월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허리 밑으로는 감각이 없었고,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물은 계속해서 차고 있었다.
“일어났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은월은 누운 상태에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얼굴만 돌렸다. 의자를 거꾸로 돌리고 앉아 있는 단테였다. 은월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와는 친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별다른 접점도 없었다. 뭐야, 지금. 단테는 은월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의자 등 받침대에 턱을 걸치고 그저 빤히 쳐다봤다.
“헤엄쳐야지.”
알 수 없는 말에 은월은 미간을 좁혔다. 장난은 이 정도로 하지……?! 물은 벌써 누워 있는 은월의 턱밑까지 차올랐다. 은월은 물을 몇 모금 삼키면서 바닥에 손을 짚고 겨우 자리에 앉았다. 콜록, 콜록. 구멍이란 구멍으로는 다 들어간 물을 기침하며 뱉어냈다. 은월은 그제야 자신이 왜 일어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허리에는 어설피 꿰맨 자국, 그 밑에는 두 다리 대신 물고기의 비늘과 지느러미가 차지하고 있었다. 은월은 눈이 커졌다. 내, 내 다리. 단테는 쿡쿡 웃었다. 은월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은월은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진 후 알딸딸한 몸으로 호젓한 새벽 골목길을 걸었다. 가로등은 희미한 불을 비췄고, 고양이 한 마리도 울지 않았다. 은월은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며 메르세데스와 아란이 이런 으슥한 곳에 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쌀쌀한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알근한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타박, 타박. 으스스한 바람에 술이 깬 은월은 발걸음 소리가 자신의 뒤를 밟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은월은 괜한 두려움에 걸음 속도를 올렸다. 타박, 타박, 타박. 따라오는 걸음도 빨라졌다. 설마 장발 때문에 여자라고 착각하는 건가, 변태 새끼. 은월은 쫓아오는 사람에게 자신이 여자가 아님을 보여 주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그만……앗.”
“안녕.”
뒤따라오던 범인이 바로 코앞에 있어 하마터면 얼굴을 부딪칠 뻔했다. 은월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몇 걸음 물러났다. 범인은 같은 동아리인 단테였다. 인사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못 잡아서. 단테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렇게 뒤따라오는 건 좀. 미안해. 단테는 겸연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은월은 더 할 말이 없었고, 그와 단둘이 걷는 지금이 어색했다.
“집이 이쪽이라, 이만.”
좀 빙 돌아가는 길이지만, 단테와 아무 말 없이 같이 걷는 것보다 낫다 생각하며 좁은 골목을 가리켰다. 은월은 단테의 대답도 듣기 전에 등을 보였다. 네 집, 거기 아니잖아. 어떻게 알았지,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둔탁한 물건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잘 자.”
은월은 그 후로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 다리 대신 녹색 물고기 꼬리가 있는 것도 단테의 짓이었다. 와중에도 물은 빠르게 점점 올라와 그의 허리까지 철렁댔다. 꿰맨 자국에서 피가 배어 나와 투명한 물과 섞였다. 허리가 쓰라렸다. 은월은 이대로 자신의 하반신을 영영 잃을까 봐 머리가 새하얘져 아무 행동도 못 하고 얼어 있었다.
“인어가 키우고 싶었어.”
피가 찔끔찔끔 흐르는 허리를 붙잡았다. 쓰……, 은월은 허리가 따끔거리는 듯 신음을 뱉어냈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단테는 전혀 다른 소리를 지껄이며 황홀한 눈길로 자신의 헐벗은 몸을 훑고 있었다. 은월은 손으로 바닥을 짚어가며 유리벽으로 다가갔다. 물고기 꼬리가 힘없이 질질 끌려갔다.
“인어는 헤엄을 쳐야지.”
물은 아까보다 빨라진 속도로 찼다. 어느새 물은 앉은 은월의 목까지 넘실거렸고, 숨이 턱 막혀왔다. 컥, 커억. 은월은 목을 쭉 위로 쳐들었다. 은월은 고개를 똑바로 돌리자 숨을 쉬지 못할 만큼 물이 차 있었다. 은월은 가라앉지 않으려 양팔을 마구 내둘렀다. 단테는 두 손으로 턱을 받히고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은월은 자신이 왜 이런 꼴을 당하고 있어야 하는지 화가 불쑥 치밀어 올랐다.
“지금 누굴 장난감, 컥,”
말하는 은월의 입에 다시 한번 물이 들어갔다. 고르륵거리는 거품 소리가 났다. 한 번 물을 삼킨 은월은 물속에서 쿨럭이며 자꾸만 물을 삼켰다. 결국 물속에 빠진 은월은 실눈을 뜨고 고통스러운 듯 허우적대며 물 위로 올라오려 애썼고, 겨우 수족관 위로 올라와 팔과 얼굴을 꺼냈다. 단테는 괴로워하는 은월과 다르게 그 여느 때보다 더욱 행복해 보였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은월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단테는 홀린 듯 수족관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수족관 대충 샀는데, 너한테 딱 맞잖아? 그는 은월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은월은 그의 행동이 끔찍했다.
“제발…….”
“뭐가?”
단테는 수족관 밖으로 나온 은월의 얼굴을 쳐다보며 드디어 그의 말에 대답했다. 은월은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깨물었다. 나한테, 도대체, 왜…… 은월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단테는 은월의 뚝뚝 끊어진 말을 이해한 듯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인어공주를 닮았거든.”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울컥한 은월은 유리벽을 잡고 넘어오려 했지만, 단테는 의자를 수족관 앞으로 끌고 와 위에 올라선 후 넘어오려는 은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안 되지, 안 돼. 인어는 물에 있어야지.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단테는 은월의 머리를 힘껏 눌러 다시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은월은 자신을 물속에 밀어 넣는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놔.”
은월은 단테의 말이 안 들리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손목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오히려 끌어당겼다. 그도 물속에 빠뜨릴 생각이었다. 단테는 한숨을 푹 쉬더니 뾰족한 물건을 쥔 다른 손으로 은월의 손을 찍었다. 따끔한 고통에 움찔한 사이 단테는 손을 뺐다.
“말 잘 들었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응?”
이젠 은월의 손에서도 피가 나고 있었다. 단테는 안쓰럽게 쳐다보더니 어디론가 들어가더니 상처밴드를 가져왔다. 은월, 손 내밀어 봐. 단테가 사라진 사이 수족관 밖으로 얼굴과 손을 내밀고 있던 은월은 단테가 오자 황급하게 물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그러고 있는 것도 예쁘다.”
단테는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자리에 앉아 수족관 구석에 박혀 있는 은월을 구경했다. 결국 은월은 숨이 부족해 다시 유리벽을 짚고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은월, 손. 단테는 상처밴드를 흔들었다. 은월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단테는 찔린 곳에 물기를 닦고 상처밴드를 발랐다.
“네가 다치는 건 싫어.”
은월은 어이가 없었다.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찌르고, 자신의 다리 대신 물고기 꼬리를 붙인 사람이 자신이 다치는 것은 싫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 이건. 은월은 물고기 꼬리를 가리켰다. 단테는 낭창하게 눈을 깜빡였다. 말했잖아, 인어공주 닮았다고. 기다려 봐. 단테는 또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테는 기다란 통을 들고 나왔다. 네 다리야. 나는 네 목소리를 못 빼앗아가니까……내 말 잘 들으면 줄게. 못 믿겠음 확인시켜줄까? 단테는 눈을 빛냈다. 은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토기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갖다 놓고 올게. 은월은 통 안에 든 게 다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고, 설사 맞더라도 썩어 문드러져 되찾지도 못하고, 도로 붙일 수 없을 것을 알았다. 지금 은월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모순적이고 사납고 위선적이고 제멋대로인 단테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는 것뿐이었다.
은월은 붙잡힌 후로 날짜를 헤아리는 것을 관뒀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단테가 밖에서 기분 좋은 일이 있었으면 그럭저럭 지나갔고, 기분 나쁜 일이 있었으면 억지로 물에 밀어 처넣은 후 인어처럼 헤엄을 시켰고, 밥 대신 물고기가 먹는 사료 따위를 뿌리거나 위협적으로 수족관을 내리치거나, 시큰거리는 허리를 붙잡고 왜 자기를 봐주지 않는 거냐며 울었다. 은월은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무의미했다.
“은월, 뽀뽀.”
은월은 물속으로 들어와 유리벽 가까이 가 손바닥과 입술을 댔다. 단테도 은월을 따라 유리벽에 손바닥과 입술을 마주 댔다. 차가운 유리만 느껴졌다. 단테는 그래도 마냥 좋은지 한참을 대고 있다 떼고선 벽을 톡톡 두드렸다. 은월은 황급히 밖으로 얼굴을 쳐들고 연신 거친 숨을 뱉어냈다.
“힘들었어? 밥 먹을까?”
은월은 단테의 표정을 살피다 그래, 하고 대답했다.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단테가 기분이 좋은 날이면 수족관에서 나와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단테는 의자를 끌고 와 수족관 앞에 두고 올라섰다. 은월에게 팔을 내밀었다. 밥 먹자. 은월은 단테에게 들려 수족관 밖으로 나왔다. 금붕어처럼 물 위로 뿌려 주는 사료를 먹는 것도 치욕스러웠지만, 단테에게 안기다시피 수족관 밖으로 나와 품에 안겨 떠먹여 주는 밥을 먹는 것도 똑같이 비참했다.
“오늘 같은 날만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
은월은 단테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단테의 눈치를 보고, 기계적인 대답을 했다. 입으로 들어오는 게 어떤 음식인지, 어떤 맛인지도 모르고 목구멍으로 넘겼다. 예쁜 손 쭈글쭈글한 거 봐, 오늘은 나와 있을래? 은월은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인어가 뭍을 좋아하면 쓰나.”
은월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단테는 은월을 알기 쉽다 생각하며 촉촉하게 물기가 남은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었다.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머리카락이 툭툭 걸렸다. 이대로 마르면 뻣뻣하겠다, 그치? 은월은 단테의 저의를 알지 못해 입 안에 남은 밥알을 굴릴 뿐이었다.
“샴푸 다 써 가는데, 새것 사와야겠다. 그런 김에 오늘 샤워할까?”
은월은 사람이 아닌 인어가 되고 나서 온종일 물에만 잠겨 있어 샤워할 일이 별로 필요 없었다. 단테가 샤워하자는 말은 야릇한 뜻이 담겨 있었다. 은월은 싫어도 좋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싫다고 대답하면 바로 물속으로 처넣어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밥 다 먹었지?”
은월은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테는 다 먹은 식기들과 수저를 가지런하게 정리한 후 부엌 싱크대에 내려놨다. 그 후 나갈 채비를 끝낸 단테는 애완동물을 만지듯 앉아 있는 은월을 안아 들어 수족관 안으로 도로 넣었다. 속 안 좋은 건 아니지? 은월은 유리벽에 위에 손을 대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단테는 만족스럽게 쳐다보며 신발을 신었다.
“금방 다녀올게. 여기 있어.”
도어락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단테가 나갔다. 은월의 머리에 든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도망가야 한다. 그가 탈출을 처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단테가 외출할 때마다 계획을 차근차근 세웠고, 오래간만에 하는 외출이었다. 드디어 생긴 기회였다. 은월은 수족관 밖으로 나오려 몸을 앞으로 숙였다.
역시나 수족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다. 점점 성급해진 은월은 허리를 더 굽혀 상체를 완전히 수족관 밖으로 빼냈다. 그러자 허리가 수족관에 걸렸다. 아직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허리는 상처가 수족관에 눌리자 마구 쑤셨다. 읏, 은월은 인상을 찌푸리고 버둥댔다. 그 힘에 수족관이 점점 앞으로 넘어가는 듯싶더니,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다. 은월은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여기저기 튄 파편에 몸이 긁히고 베여 피가 고이고 흘렀다.
윽……. 그에게 일일이 상처를 확인할 틈 따위는 없었다. 자신의 옷은 항상 소파 옆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은월은 안에 휴대폰이 있을 거란 믿음 하나로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피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피가 은월의 움직인 흔적을 따라 남아 있었다. 팔을 뻗어 옷을 마구잡이로 잡아당겼다. 우당탕! 옷걸이가 그대로 넘어졌다. 은월은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졌다. 단테가 휴대폰을 그대로 놔뒀을 리가 만무했다. 은월은 멍하게 있다 이럴 시간이 없는 것을 깨닫고 맨가슴을 가릴 옷을 걸친 후 다시 문 쪽으로 기어갔다. 단테가 나간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단테가 돌아오기 전에 일단 도망쳐야 했다.
문 앞에 다다른 은월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급하게 입은 옷마저 붉게 물들어 있는 데다, 물고기 꼬리의 비늘마저 이리저리 긁혀 꼴사나웠다. 은월은 다친 몸을 확인하지 않고 문고리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문고리는 한참 위에 있어 아무리 낑낑대도 역부족이었다. 팔이 안 닿는 것은 은월의 계산에 없는 듯 이 상황이 꽤 당혹스러웠다.
삑삑,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뻗은 팔이 그대로 얼었다. 암만 애써도 열리지 않던 문이 벌컥 열렸다. 단테는 바로 앞의 은월을 내려다봤다. 은월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다. 단테는 문을 닫고 신발을 벗었다. 단테는 여유롭게 은월을 안고 안으로 들어왔다. 다 다쳤네, 괜찮아? 수족관은 새로 사야겠네. 은월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단테는 아무렇지 않게 유리 조각을 밟았다. 비늘도 다 긁혔잖아. 이것도 바꿔야 하려나……. 혼잣말을 들은 은월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은월의 몸은 소파에 털썩 떨어졌다. 은월, 네가 도망가는 건 상관없어. 되찾아올 거니까. 단테는 웃고 있었지만 웃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가는 건 안 돼. 나만 가질 수 있고, 나만 볼 수 있어. 내 곁에 있어 줘. 단테는 답지 않게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내가 잘할게, 가지 마, 잘못했어…… 갑자기 단테의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은월은 모순적인 말을 지껄이는 그를, 눈물을 흘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작 울어야 하는 것은 단테가 아닌 은월 자신이었다. 또라이 새끼. 이 말을 꺼내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은월은 점점 가까워지는 단테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은월은 눈을 감아버렸다. 모든 것이 깜깜해졌고, 그는 결국 인간이길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