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ercival Graves
X
Sophia S Cynwulf
< 퍼시발 그레이브스 X 소피아 S 키네울프 >
-제인-
저녁이었다. 아직 하늘에는 붉은 빛이 번져 있는 시간일지라도 울창하게 우거진 숲의 안쪽은 나무의 그림자가 진 탓에 어두웠고, 사내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구두 밑창 아래에서 겨울바람에 마른 모래가 사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들쭉날쭉한 크기의 나뭇가지며 덤불, 큰 키의 풀들이 사내의 긴 코트 자락을 스쳤다. 그러나 어두운 숲 속을, 제대로 된 길도 아닌 샛길을 헤쳐 나가면서도 그의 태도에는 거침이 없었다. 발치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 복잡하고 스산한 숲 속에서 길을 잃을 걱정이라고는 티끌만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마치 몇 번이고 그 길을 걸었던 것처럼. 숲 너머에 있는 목적지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점차 흐려지는 숲의 경계에 다다라서야 사내는 바삐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던 사부작거리는 모래의 소리와, 작게 팔락이는 코트 자락의 소리도 한 박자 늦게 멈췄다. 붉은 노을빛도 어느새 사라지고 조금씩 별이 보이기 시작하는 밤, 남색 하늘을 그대로 뒤집어 놓은 듯한 바다를 마주하고, 사내는 걸음을 서두른 탓에 차오른 숨을 내쉬었다. 숨을 몰아쉬었다고는 해도, 그는 그 한 번의 호흡이 다른 것들보다 컸을 뿐, 흐트러진 모양새는 아니었다.
숲은 바다의 모래사장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땅의 안쪽으로 둥글게 파인 해변에 낮고 느리게 파도치는 소리가 울렸다. 파도는 전혀 사납지 않았다.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하던 저녁 무렵 살을 엘 듯이 바람이 불었던 것과는 다르게 겨울바다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낮이었다면 햇빛을 그대로 투영시켜 깊이에 대한 감각조차 모호해질 정도로 그 바닥까지 드러내 보이곤 하던 바다는, 이번에도 촘촘한 남색 하늘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햇빛 아래에서 선명히 보았던 그 심연을, 단순히 반나절 지났다는 것만으로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낯설다. 사내는 심연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조금 더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당겼다. 넓어졌다가 줄어들곤 하는 바다의 끝과 자신의 발끝 사이에 해변이 있다. 각기 크기는 달랐지만, 손톱만한 것부터 시작해 커 봐야 사내의 주먹 반만 한 크기의 둥글고 매끈한 자갈들이 파도에 쓸려갔다가 포말 아래에서 데굴거리고 구르기를 반복한다.
사내는 바다가 고요한 까닭을 알고 있었다. 바다를 고요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도, 그 직접적인 원인의 원인이 되는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그것을 자각할 필요는 없었다. 괜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바다를 손아귀에 넣은 것 같은 자만심을 느낄 일도 없었다. 사내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그저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그런 다음에는 한 걸음 나섰다. 자갈 해변 위로 깔리는 발걸음 소리는 숲의 촘촘한 흙길을 걸을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숲을 가로지르던 때와 대조되도록 사내의 걸음은 느릿했다. 해변에서 바다를 향해 삐죽 튀어나온 넓고 평평한 바위가 그의 목적지였다. 바닥에 깔린 자갈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 보여도, 거대한 암석은 고요한 바다만큼이나 입이 무거웠다. 파도의 방향이 지금까지와는 명백하게 틀어지면 물살에 쓸려 다니는 자갈들은 놀란 듯이 수군거리지만 그것은 늘 그랬듯이 사내의 발을 받치고, 잔잔한 수면에 갑작스레 일어난 미약한 파장이 잦아들 때까지 그를 대신하여 소금기 어린 물보라를 받아낼 뿐이었다. 사내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 얌전스러운 소용돌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수면을 밀어 올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수면 위로 드러난 모습만은 분명히 그랬다. 그러나 이 겨울날 차가울 것이 분명한 바닷물에 몸을 깊이 담그는 것이란 멀쩡한 사람이 할 만한 발상은 아니었으므로, 그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거나 혹은, 사람이 아니라고 추론하는 것이 타당할 터였다. 그랬다. 목표에만 고정되어 있는 합리적인 시선에서 바깥의 세상에는 놀랄 만한 신비가 가득한 것이다. 예를 들면 연노란 빛의 어슴푸레한 달빛을 투과시키는, 여인의 드레스 자락처럼 하늘거리는, 인어의 꼬리지느러미라든가.
기억 속에는 엷은 붉은색으로 남아 있는 그 지느러미가 밤의 남색과 보름달의 여린 금색을 받아 우주에 가깝게도 보이는 광경을, 사내는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어깨에 닿을 만큼 길은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로 흘러내린 것을 찬찬히 쓸어 넘기는 것도, 사내가 서있는 곳으로 그녀─그 인어가 다가와서 회색 바위에 검은 물 자국을 남기며 몸을 기대는 것도 지켜보았다. 그녀가 상반신에 두르고 있는 짙은 청록색의 커다란 천─혹은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물질─이나, 조개껍질과 진주로 장식된 머리띠나, 하반신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걸려 있는 화려한 허리띠도 보았다. 그녀가 바위에 올라앉는 것에 맞추어 허리띠의 산호 장식이 흔들리며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도 들었다. 그는 그 모든 기이奇異를 익숙하게, 그러나 낯설게 지각했다. 가득찬 물과 염분의 냄새, 마주잡은 손의 물기, 인간의 것과는 다른 피부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은 피부라기보다는 차라리 비단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와, 이게 얼마만이에요!”
인어는 해맑게 말했다. 사내는 인어의 어두운 적갈색을 띠는 하반신, 정확히 말하면 그 비늘을 보던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도, 상체에도 여전히 물기가 맺혀 있지만 그녀는 전혀 추워 보이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의복으로 몸을 감싸고 무거워 보이는 긴 코트까지 차려 입은 사내와는 퍽 대조적이었다.
“응? 이렇게 가끔만 얼굴 비추러 오는 게 어디 있어요, 퍼시.”
입을 비죽 내밀며 눈을 흘기는 태도가 밉지 않은 것은, 외려 기분 좋게 다가오는 것은, 그녀의 존재가 인간의 지식을 벗어난 존재라는 점으로부터 오는 경외심 때문일까. 퍼시발은 자신이 오늘 아침 창가에 편지를 담은 유리병을 내어 놓았던 것과,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자신의 집 창가까지 갈매기가 날아왔던 것과, 그 편지에 다소 일방적으로 저녁에 가겠다는 말만 적어놓았던 것을 떠올렸다.
“……통보적이긴 했지.”
“거봐요, 그렇다니까! 저 이래 뵈도 바쁘다구요. 퍼시가 부른다고 아무 때나 나오는 쉬운 인어 아니라구.”
그녀는 투덜거리며, 그러나 진심으로 화는 나지 않았으므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화가 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불만은 있었다. 그는 늘 바쁜 사람이었고 그녀는 인간들 사이에 섞여서 살 수 없는 존재였으므로, 한밤중에 몰래 만나는 것이 아니면 얼굴을 볼 길이 없는 현실이 원망스럽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일 터였다. 그것조차 그가 직접 멀리까지 찾아오지 않으면 실현되지 않는 밀회였다. 최근 며칠처럼 그가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되면 그녀는 물러서야 했고, 그것이 그의 의도가 아님을 알면서도 주위의 모든 상황과 제약이 야속해졌다. 그러다가도 며칠 만에 그의 얼굴을, 그리던 연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아무 불만도, 불안도 없게 되는 것이다. 바라는 것은 오직 순간이 영원토록 늘어나는 것뿐이었고, 그의 곁에 머무는 것뿐이었다.
사소한 발단, 그리고 막연하게 자라난 꿈같은 바람은 곧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바다 깊은 곳의 세상은 인간들의 세상보다 여유로웠고 평화로웠기에—그곳에는 정치도, 종교도, 경제도, 과학도, 기술도, 국가도 없었기에, 그녀에게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지느러미의 끝이 바다의 표면을 스쳐, 경망스러운 박자로 물이 튄다. 그는 늘 그녀에 비해 말이 없었으므로, 그녀가 입을 다물어버리면 바다의 위에는 적막이 감돌곤 했다. 파도는 언젠가 삼지창을 쥐게 될, 그러나 아직은 어린 인어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조용하게 철썩였다.
“……내가 인간이 되면 어떨 것 같아요?”
파도소리만큼이나 작게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적막을 깨기에는 충분한 목소리였다. 자갈들은 다시금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정작 답을 돌려주어야 할 사람은, 잠시 정적을 지켰다.
“……소피.”
그는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어질 말을 위해 주의를 끌고자하는 목적이었다기보다는, 그 한 단어에 충분히 그의 의사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소피아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거절과 만류의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한 번 물어나 본 거였어요.”
가벼워진 어조와 후련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고, 그는 그녀의 옆에 걸터앉으며 대화를 이었다.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동작에서는 고급스러운 코트가 바닷물에 젖어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아서라. 전설처럼 될라.”
“물거품이 된 이야기요? 에이.”
익숙한 이야기를 떠올리고 소피아는 고개를 저었다.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는 그 이야기는 인어들이 인간을 피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으나, 동시에 그녀가 인간이 되기를 바라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건 저한테는 해당 없어요.”
“그래?”
“상대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요?”
만약 두 다리를 얻는 조건이 사랑하는 사내로부터 사랑받는 것이라면, 그녀는 물거품이 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 뜻을 담아 사내를 바라보면, 그는 그럼에도 여전히 확고하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밝은 갈색의 눈동자는 어두운 밤에도 선명하고 뚜렷하게 빛나며,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깍지를 끼고, 매혹적인 음색으로 속삭였다.
“나는 네 목소리를 좀 더 오래 듣고 싶어. 그러니까 엄한 생각 마.”
“앞으로는 좀 더 자주 보러 온다고 약속하면요.”
“그래, 그래.”
그녀를 도시로 데려가지 않는 이유가 다만 낯선 인외의 존재를 두려워할 인간들 때문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보화를 바다에 숨겨둘 작정이었다. 언젠가 상황이 달라진다면 판단은 그 때다. 지금만은, 그녀가 자신의 눈에만 보여야 했다. 이런 생각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아마 앞으로도 없을 일이었다.